바이트 홈으로 이동바이트 홈으로 이동
 

[영화 속 명대사] 팀 버튼의 <빅 피쉬>. 우리는 누구나 메타포를 꿈꾼다

  • 2013-03-18 10:53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바란다. 카타르시스를 위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들에 도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혐오하고, 등한시하기도 한다. 이 괴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야기는, 객체화 된 이야기로서만 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 이는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이야기 같은 환상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들 같았다.”

주인공 윌은 끊임없이 거짓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아버지 에드워드와 크게 싸운다. 자신이 에드워드의 이야기의 들러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항상 자신의 결혼반지를 삼켜버렸던, 호수의 전설 같은 거대한 메기의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에드워드는 늘 특별합니다. 젊은 날의 그는 운동 만능에 머리도 좋고, 용기도 뛰어난 영웅이다. 마녀를 만나러 마녀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가축들을 잡아먹는 거인과 친구가 되기도 한다.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던 도중 에드워드는 유령마을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곳은 지상낙원으로, 사람들은 모두 신발을 벗은 채 살고 있다. 마을에 머문 첫날 밤, 에드워드는 숲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는데, 뱀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유령 마을의 작은 소녀 제니는 그것이 보는 사람마다 형태가 다른 물고기라고 말한다.

“신발도 없이 어떻게 떠날 건데요?”
“발이 아프겠지. 아주 많이.”


에드워드는 유령마을을 등지고 떠난다. 유령마을보다 좋은 곳은 세상에 없겠지만, 그에게는 아직 보아야 할 것도, 겪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꼭 돌아오겠다는 제니와의 약속과 함께 에드워드는 신발도 없이 여행길에 오른다.

“자넨 연못에서는 큰 물고기지만 바다로 가면 빠져 죽을거야.”

서커스장에서 일하게 된 에드워드는 운명의 여인 산드라를 만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에드워드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커스단에서 무급으로 일한다. 서커스 단장은 그녀가 에드워드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 같은 존재라며 말리지만, 에드워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실 난 늘 바보였단다.”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굴하지 않는다. 실패를 인정할 줄도, 포기할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는 모두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 지상낙원 같은 마을에 가 보기를 원하기도 하고, 거인 같은 환상 속의 인물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바보처럼 사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쟁취하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보는 일들은 아주 매혹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갖은 이유로 바보가 되기를 포기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을 담아 그들을 '바보'라는 말로 억누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드라는 어느 새 에드워드에게 끌리게 되고, 그들은 결혼하게 된다. 에드워드의 이야기 속에서 윌의 어머니 산드라는 항상 최고의 여자가 된다.

"그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로맨틱해."


"아버진 이 지루한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만드시는 거야."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에드워드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에드워드 또한, 그런 바보가 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바보를 꿈꾸며 산다 해도 현실은 바보에게 냉혹한 것이다.

“거짓말은 다섯 살 난 아들이 침대에서나 듣는 거예요.”
“난 평생 내가 아닌 적이 없었다. 다른 내가 있다면, 그건 잘못 본 거야.”


윌의 아내 조세핀은 윌에게 아버지와의 대화를 권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다. 에드워드는 가끔 자신에게 물이 필요하다며 옷을 입은 채 욕조에 들어간다. 에드워드에게 물이란 대체 무엇일까? 물의 이미지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 어머니의 양수, 즉 생명의 근원의 메타포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에드워드에게 물이란, 환상이다. 자신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줄 무언가가 바로 물인 셈이다. 에드워드는 빅 피쉬가 되기를 꿈꾼다. 결코 잡히지 않기에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빅 피쉬 말이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잠겨 보며, 끊임없이 물을 마시며 에드워드는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날 윌은 창고를 정리하다가 옛 문서들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의 실마리들이, 윌에게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윌은 집을 양도하다는 문서에 적힌 이름, 제니퍼를 발견하고 그 집을 찾아간다. 제니퍼는 윌에게 옛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에드워드가 유령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 마을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는 것과 에드워드가 유령 마을을 재건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처럼 만들었다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제니퍼, 에드워드가 젊은 시절 유령 마을에서 만났던 소녀 제니는 에드워드가 고쳐 준 집에서 계속 살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윌에게 말한다.


“아버지의 방식으로 생각해라.”

그녀가 말하는 아버지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윌은 의사에게서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의 결혼반지를 삼켜버린 빅 피쉬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탄생의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의사는 결혼반지와 물고기 이야기, 그리고 이 평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들 중 고르라면 자신도 에드워드처럼 물고기의 이야기를 고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영장을 청소하던 윌에게도 빅 피쉬의 환상이 보인다.

“내가 어떻게 죽는지 말해다오.”

임종이 가까워진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윌은 이 갑작스런 에드워드의 요청에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아버지를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이제 발화권은 윌에게로 넘어왔다.

병원을 탈출해 강으로 가자,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모든 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슬픈 기색도 없이, 그저 에드워드를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며 말이다. 윌의 이야기 속에서 진짜 빅 피쉬가 된 에드워드는 강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산드라에게 자신이 삼켰던 결혼반지를 주고 물고기의 모습으로 변해 강으로 사라진다.

이 터무니 없는 이야기에 대한 에드워드의 대답은 “그래, 아주 정확하구나.”였다.

그는 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을 맞는다. 현실의 에드워드는 먹지도 못하고 잔뜩 쇠약해 진 초라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이야기 속의 에드워드는 빅 피쉬가 되어 강을 헤엄치며 떠날 수 있었다.

결국 윌은 에드워드의 방식을 인정하고 에드워드의 모험담을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줍니다. 이 갑작스런 이해의 합치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빅 피쉬>는 아들과,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극적인 화해를 그린 영화인가?

먼저 융의 집단 무의식설에 동의하는지 묻고 싶다. 전 세계의 인간들이, 공통된 기억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각 나라의 신화들은 같은 모티프를 가지고, 전 세계에서 비슷한 발명품들이 발명된다. 대륙과 대륙이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아주 오랜 옛날에 말이다.

<빅 피쉬>는 우리들의 공통된 이상향, 그러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이상향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꿈꾸어 왔을 이야기들, 그러나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들. 이것들을 물속에서 꺼내어 사람들 앞에 펼쳐낸 이가 바로 에드워드다. 모두가 갖기를 원했지만, 아무도 실제로 거머쥐려 하지 않았던 보석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현실의 에드워드는 빅 피쉬가 되지 못했다. 그 또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일해 온 평범한 남자다. 에드워드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꿈꾸던 이야기들을 메타포로써 자신의 인생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이 아닌 이야기들을 위해 글을 쓰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소설로 만들었다. 때문에 에드워드가 자신과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윌에게 공통분모가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신발은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의 메타포로 자주 쓰인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을 떠올리시면 이해하시기 쉬울 것이다. 유령 마을에 신발을 벗어두고 온, 에드워드는 이제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은 바보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환상은 현실과 이어질 수 있을 때 그 의미를 획득한다. 마냥 아름다운 환상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지 못한다. 팀 버튼의 환상은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빅 피쉬>를 명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승혜 칼럼니스트

# 본 코너는 대한민국 칼럼아카데미 nagle 제공으로 진행됩니다. http://nagle.co.kr

바이트 데스크 칼럼 필진


이메일 :
bait001@naver.com